Delayeon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본문
22.03 밀리의 서재
믿었다가 속은 것도 배신당한 것에 해당하겠지만 못 믿었던 것이 실상은 믿을 만한 거였다는 것 역시 배신당한 것일 수밖에 없겠고 배신의 확률은 후자의 경우가 훨씬 높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팔십 평생을 회고하며 자신 있게 못된 사람 만난 일 없다고 술회할 수 있듯이 세상엔 믿을 만한 게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올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 풍진세상風塵世上에서 노력한 만큼만 잘살기를 바라고 딴 욕심이 없다면 그건 보통 사람을 훨씬 넘은 성인의 경지이다.
낮에 꾸는 꿈이란 별건가.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가 즉 꿈일 수 있겠는데 나는 그걸 기피하고 다만 시계처럼 하루를 보내기에 급급하다. 시계처럼 산다면 제법 정확하고 신용 있는 사람 티가 나지만 시계가 별건가. 시계도 결국은 기계의 일종이거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이 기계처럼 살아서 어쩌겠다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계획 밖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길 소망하면서 가슴을 두근대고 싶다. 밖에 나갈 땐 정성껏 화장을 하고 흰 머리카락이 비죽대지 않나 살펴 머리를 빗고, 어떤 옷이 가장 잘 어울리나, 이 옷 저 옷 입었다 벗었다 하고 싶다. 예기치 않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서.
나에게 부산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은 고향과 같은 곳이다. 마음이 시리고 헛헛할 때,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눈에 내가 불쌍해 보일 때, 수녀원의 언덕방이나 그 뒷산의 바다가 보이는 의자 생각만 해도 크나큰 위로가 된다. 이 일만 끝마치면 거기 가서 쉬리라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도무지 내키지 않던 일에 새로운 신명이 나기도 한다.
노래도 못한다고 생각할 적엔 나 같은 건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과 다름없더니,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니까, 노래만 빼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줄줄이 떠올랐다.
그때 만난 어떤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한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이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손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남의 좋은 점을 찾아내면 네 속이 편하고 네 얼굴도 예뻐질 거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철들고 어른 되어,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된 후에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고, 어떡하든지 지키고 싶은 생활신조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나한테 하신 것과 똑같은 잔소리를 내 아이들에게 하게 되었고, 내 성질까지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꼭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중고등학교 땐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성공한 인생을 반쯤 달성한 줄 알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알아주는 대학을 나올수록 가족이나 세상 사람의 기대치도 높아집니다. 기대에 못 미칠 때 일류 학벌이 도리어 열등감이 됩니다. 열등감처럼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게 없는데, 그건 그 사람이 처음에 우월감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으스대는 쾌감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안 알아주는 입장을 참아내지 못하는 겁니다.
하늘이 낸 것 같은 천재도 성공의 절정에서 세상의 인정이나 갈채를 한 몸에 받는다 해도 그 성취감은 순간이고 그 과정은 길고 고됩니다. 인생도 등산이나 마찬가지로 오르막길은 길고, 절정의 입지는 좁고 누리는 시간도 순간적이니까요. 이왕이면 과정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생은 결국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과정을 행복하게 하는 법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등 만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관계가 원활치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반드시 그도 나를 미워하게 돼 있습니다.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그가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는 불행감의 거의 다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지 않고 나쁜 점만 보고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곧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인간관계 속에서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해 버릇하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거지요.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현재의 인간관계에서뿐 아니라 지나간 날의 추억 중에서도 사랑받은 기억처럼 오래가고 우리를 살맛 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너희들 모두모두 행복하라는 말씀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보답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외손자 사랑이 좋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 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 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 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神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심심해하지 않는 게 평화가 아니라 그런 일이 입김 속에서, 즉 사랑 속에서 될 수 있는 대로 활발하게 일어나는 게 평화가 아닐는지.
글은 아무렇게나 쓸 게 아니라는, 글을 하나 써내는 것도 자식을 하나 낳아 놓는 것만큼 책임이 무거운 큰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사교적인 모임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여러 갈래의 우호적 또는 적대적, 정열적 혹은 타산적 관계의 와중渦中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조금 비켜나 있고 싶어 하는 근성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점점 내 성격 형성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비켜나 있음을 차라리 편안하게 여기게 되었고, 와중에 있는 것보다는 약간 비켜나 있으면 돌아가는 모습이 더 잘 보인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허상에 바쳐진 애증은 헛된 정열일 뿐 결코 진정한 힘은 아니다, 앞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실상뿐 아니라 자신의 실상까지 바로 보는 것만이 진정한 힘이 되리라는 새로운 희망도 생겼다. 원한이란 반드시 복수의 욕구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평화가 목적일 뿐 아니라 수단도 되어야 하는 통일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한 정서가 아니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인한테서도 연민할 만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한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안 죽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은 없다지만 너무 안 죽고 오래 살아 혈육이나 친구 중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죽는 걸 보아야 하는, 순서가 바뀐 죽음처럼 무서운 건 없다. 한 번 겪어보아 그 고통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래 살면 행여 또 그런 일을 당할까 봐 그래서 어서 죽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 나이 순서대로 죽게 되어 있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을까도 싶지만, 그렇게 되면 산다는 것이 죽음 앞에 늘어선 무력하고 긴 줄서기하고 무엇이 다를까.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만약 인간이 안 죽게 창조됐다고 가정하면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인간으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창조적인 노력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자식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면 사랑의 기쁨인들 있었으랴. 추醜가 없으면 미美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이나 불행이란 잣대로는 잴 수 없는 내 유년기의 완벽한 평화는, 그러나 언제고 거길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상실의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낙엽은 은행나무처럼 찬란하지 않은 소박한 누런색이지만, 가지 끝의 잎들은 부끄럼 타듯이 살짝 붉다. 저 고운 빛깔을 무엇에 비할까, 혼자 보기 아까워하면서 바라보고 있는데 딸애가 푸듯이 말했다. 엄마, 저 살구나무 가장귀 좀 봐요. 꼭 봉숭아 꽃물 든 손가락을 뻗쳐 들고 있는 것 같잖아요. 아아, 그래 바로 그 빛깔이었구나. 딸의 표현은 절묘했고, 나는 감동했다. 누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 맛에 산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한꺼번에 많은 아름다운 것을 봐두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탐욕이다. 탐욕은 추하다.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窓이 허락해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서 허락될까. 허락된다면 그때는 언제쯤일까. 10년 후쯤이 될까, 20년 후쯤이 될까, 몇 년 후라도 좋으니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싶다.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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