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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 신경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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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 신경숙

opoi 2023. 2. 15. 02:05

23.02 학교 도서관
 

깊은 슬픔
신경숙 첫 번째 장편소설 『깊은 슬픔』개정판(양장본). 한 여자와, 그녀가 짧은 생애 동안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예민하면서도 따뜻한 시선과 미세한 삶의 기미를 포착해내는 울림으로 담아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은서'와 '완', 그리고 '세'. 그들 세 사람을 맺어주고 환희에 빠뜨리며 절망케 하는 매개는 사랑이다. 사랑의 올이 얽히고 풀림에 따라, 고향 '이슬어지'에서 함께 자라난 세 사람의 운명은 서로 겹치고 어긋난다. 작가는 사랑과 운명이 자꾸만 어긋나면서 서로의 기대와 희망을 배반하는 과정을, 덧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실린 시선으로 정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저자
신경숙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06.03.30

 
불가항력이라고 스스로 느끼는 상태에 이른다는 건 행복한가, 불행한가? 서로 그러기로 하자고 약속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진실로 자신마저 제어할 수 없는 힘이 사람에게 존재하는 게 살아가는 데 힘일까, 아닐까? 내기를 거는 심정으로 나, 그 여자의 괴로움을 기웃거렸다. 
/ 10쪽. 
 
나는 가끔 사람의 목덜미에서 그 사람의 앞날을 느낀다. 
 
뒷모습의 중심을 이루는 목덜미의 선. 
 
혼자 있어도 고개를 자주 숙이는 목선은 그 사람의 운명도 고개 숙이게 하는 건 아닌지. 여럿 속에서 고개를 한껏 쳐드는 목선은 그 주인의 운명을 고개 들게 하는 건 아닌지. 숙임과 듦 사이엔 무엇이 있는지, 나아감과 물러섬 중 무엇이 더 적극적인지. 가질 수 있는데도 놓기란, 나아갈 수 있는데도 물러서기란 힘겨워, 나, 그 여자 목선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본다. 
/ 11쪽. 
 
존재를 견딘다는 건 시간을 견딘다는 게 아닌지, 존재는 어느 만큼 운명적이 아닌지.
/ 12쪽. 
 
적어도 폭풍을 들을 때 은서는 현대음악요법의 기초이론인 카타르시스 이론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넘쳐흘러 덜어진다. 가득 찬 물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그렇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고. 
/ 18쪽. 
 
무슨 일이든 기다릴 수만 있으면, 삶이란 기다림만 배우면 반은 안 것이나 다름없다는데, 은서는 웃었다. 
/ 19쪽. 
 
어쩌면 그 마음 시림이, 둘이 아무리 밥을 실컷 먹고 드러누워도 남아 있던 그 허기가 ···  은서는 저녁을 짓는 이수를 보며 쓸쓸했다. 그것이 너를 어디에도 마음 못 붙이게 하는지도 몰라. 그것이 나에게 또한 괜히 세를 밀쳐내게 하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완에게로만 가게 하는 건지도 몰라. 
/ 63쪽. 
 
그 얼굴은 말하고 있다. 뭔가 지극한 것이 이 세상엔 있다고. 섣불리 이개버릴 수 없고. 섣불리 건너짚지 못할 게 이 세상엔 있다고. 
/ 120쪽.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면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지. 어쩌면 그중의 어떤 것도 진짜 자기 자신이 아닐지도 몰라. 그 여러 모습을 다 알아내서 합쳐 보면 모를까.
/ 154쪽. 
 
은서가 저리 되기 전에는 시선 하나를 느끼고 사는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의 차이를 세는 몰랐다. 어려서부터 은서의 시선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었기에. 
어디서나 은서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 156쪽. 
 
"그땐 자라가 나를 끌고 바다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네 말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아. 다시 그런다면 따라가지 않고 손을 놓을 거야. 왜 이해는 이렇게 늦게 오는 건지. 다 지나가고 돌이킬 수 없을 때 오는 건지."
 이해하고 싶지만 삶은 이해하는 게 아닌지 모른다. 그냥 살아가야 하는 건지도. 그렇기 때문에 아픔이 이렇게 멈추지 않는 건지도. 
/ 233쪽. 
 
오늘은 슬픔에 싸여 있다가도 내일은 전혀 다른 감정에 놓여질 수도 있죠. 순간순간 진정해야 할 까닭은 거기 있는지도 몰라요. 
/ 248쪽. 
 
인생은 괴로움을 통해서만 나에게 그 의미를 보여주기로 한 것 같았다. 
/ 277쪽. 
 
구태여 말하라면 그 파란 것이란 희망을 뜻하겠지마는 내 생각은 달라요. 그 파란 것은 불행일 수도 있고, 절망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거기에 온통 마음을 털어 바칠 수 있을 만큼 그리운 것을 말하지, 싶습니다. 절망적인 것이라 해도 마음을 붙이고 살 그리운 것, 그것 말입니다. 
/ 354쪽. 
 
걸음을 멈출 때마다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지옥이 어디 따로 있겠소. 그리움이 끊긴 마음이 지옥이지. 
/ 361쪽. 
 
"나는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아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그것과 싸운다면 믿겠어요?"
"···"
"어느 날부터 내 마음이 그랬어요. 마치 어린 시절 소녀 시절도 아무것도 없이 처음부터 성인 여자가 돼서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내가 왜 그런가 생각해봤죠."
"그래, 생각해냈어요?"
"기다림이었어요. 내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있었어요. 기다림이 끊어지니까 마치 나 혼자서만 외떨어진 장소에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아무런 기다림이 없어지기는 처음이었어요. 가능한 일이든 불가능한 일이든 마음속에 기다림이 있으면 그것에 마음을 붙여 하루를 보낼 수가 있지 않아요? 전화벨이 울리면 반갑기도 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고, 밤길을 걷게 될 때는 옆에 있겠거니 생각하며 혼잣말도 해보고요."
은서는 김학수 피디와 만났던 시인의 병색 짙은 얼굴이 느닷없이 떠올라 말을 멈췄다. 그리움이 끊겼다고 했던가, 그래서 마음이 지옥이라고 했던가, 그 지옥의 마음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했던가. 내 끊긴 기다림이 그의 마음에서 끊긴 그리움과 같은 것이었나, 그래서 그토록 시인의 지는 목련꽃 같은 얼굴에 가심이 저렸던가. 그랬던가. 
/ 378쪽. 
 
변화를 원하지 않는 마음일 때는 두 가지 상태겠죠. 한쪽은 삶을 어느 정도 어렵게 지나와 이제 안정되었기에 이만하면 됐다 싶은 것이고, 다른 하나엔 상처가 숨어 있겠죠.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아프게 단념해놓고, 단념하지 않았을 때의 그 괴로움을 알기에 마음이 다시 그걸 원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냄새말예요. 은서씨가 전자일 경우는 아닐 테고···. 
/ 383쪽. 
 
은서는 다시 일어섰다. 다시는 그래서는 안 돼, 그 공허함 속에 다시 놓여서는 안 된다. 정말 안 된다. 너무 피로하고 괴로운 일이었어. 이제 배회하거나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있지 않겠어. 은서는 제 자신에게 속삭이며 턱턱턱 걸어서 공원을 빠져나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 387쪽. 
 
 이수에게. 
 나는 어디를 응시해야 할지를 모르겠구나. 
 마음은 이렇게 사무친데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를 모르겠어. 이렇게 앉아보고 저렇게 앉아보다 바닥에 엎드려본다. 이렇게 엎드려본 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줄곧 오래 전부터 이렇게 엎드려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렇게 엎드려서 줄곧 무엇을 기다렸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어렸을 땐 내가 이렇게 엎드려 있으면 네가 곁에 와 같이 엎드렸지. 그때 우리 엎드려서 무얼 기다렸니?
 네가 내 곁에 엎드려 있다면 네게 묻고 싶어.
 나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여자가 남자에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묻는 이런 질문은 소용없단다. 시간이 지나면 형편없이 낯설어져 있거든. 나를 바라봤던 사람은 다른 곳을 보고, 나 또한 내가 바라봤던 사람을 버리고 다른 곳을 보고, 나를 보지 않던 사람은 나를 보지. 서로 등만 보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야.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는 관계 속의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 묻는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 
 너는 내 동생. 너는 알겠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는 변하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대로 간직하겠지. 
 (...) 네가 바라보고 애착하는 것을 향해 대답하렴. 네가 바라보는 것이 네가 애착하는 것이 나일 거야. 영혼이란 그런 것 아니겠니. 마음속의 사람, 그 사람이 보는 것 속에 머물지 않겠니. 
 나, 인생에 대해 너무 욕심을 냈구나. 
 한 가지 것에 마음 붙이고 그 속으로 깊게 들어가 살고 싶었지. 그것에 의해 보호를 받고 싶었지. 내 마음이 가는 저이와 내가 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고 싶었어. 늘 그러지 못해서 무서웠다. 그 무서움을 디디며 그래도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지. 하지만 이제 알겠어. 그건 내가 인생에 너무 욕심을 낸 거였어. 
 이 깨달음은 내게 아무런 힘을 주질 않는구나. 내가 그를 볼 때, 그는 다른 그를 보고, 그는 또 다른 그를 보는, 그런 비껴감의 슬픔을 반복하며 저 봄에 발을 디딜 힘이 내겐 없구나. 그것들이 내게 남긴 공허와 망상과 환청과 의심으로는 버틸 힘이 없어. 
 일이 잘못되었어.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단다. 이렇게 잘못 되기 전에 다 정리하려고 했지. 지난 일들을 생각지 않으려고 했단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다른 사람과 정다웠던 기억들, 다 창고 속에 넣으려 했단다. 그런데도 이수야. 어떻게 된 셈인지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건 기억밖에 없는 것 같았어. 그것만이 유일한 것 같았다. 
 그래, 일이 잘못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 생각만 인생을 생각하게 했어. 그 생각만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줄 것 같았어. 그 사람이 저이인가 하면 그이는 이미 내 편이 아니더구나. 왜 안 그러겠니. 세상에는 나 같은 여자들이 수도 없고, 한때나마 나를 사랑한 건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내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야. 서로 사랑했을 때조차도 그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른 이를 사랑했을 텐데 왜 안 그러겠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내가 살아갈 힘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너만은 생각하지 말아다오. 힘을 잃지 않으려고 내가 믿는 기억들을 찾아 헤맸다. 그것도 힘이 되질 못해 어머니 얼굴을 떠올렸어. 어느 날은 책상 앞에 힘을 내야지, 힘을 내야지, 내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지, 하고 써붙이기도 했지.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어머니 생각에, 숨만이라도 그분이 가신 다음에, 라고 내 자신에게 속삭이고 속삭였구나. 
 하지만 너무 늦었어. 
 나, 삶을 되찾기엔 너무 멀리 나와버렸어. 무엇이라도 간절하게 원하면 거기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지.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 원하는 것에 닿아지지가 않았어.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 
 나, 이렇게 나를 놓아버리지만 않았다면 언젠가 너에게 읽어줄 글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그럴 텐데, 아마도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겠지.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 577-581쪽. 
 
수많은 '너'들이 사라졌는데도 이 작품의 첫 문장과 끝 문장을 골라내던 그때의 열정이 이렇게 고스란히 되살아나 겁이 나기도 하다. 지나온 곳으로는 어디로도 돌아가지 말자, 고 다짐한다. 
/ 5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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