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ayeon
새의 선물 / 은희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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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은희경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22.06.03
나는 지금도 혐오감과 증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복의 대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곤 한다. 쥐를 똑바로 보면서 어금니에 고인 침 사이로 스테이크를 씹어 넘기듯이. 그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 10쪽.
나에게 있어 사랑은 거의 마음먹은 대로 생겨나고 변형되고 그리고 폐기된다. 삼십 대 중반을 넘긴 나에게 지금까지 사랑으로 인한 가벼운 비탄과 회한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것도 달콤한 구색이었을 뿐이다. 나는 사랑이란 것은 기질과 필요가 계기를 만나서 생겨났다가 암시 혹은 자기 최면에 의해 변형되고, 그리고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 11쪽.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이십 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 그러므로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유지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
/ 12쪽.
그때 1969년 겨울, 나는 조그만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우고 있었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마침내 목록을 다 지운 나는 내 가운뎃손가락 마디에 연필 쥔 자국이 깊게 파인 것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인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도 나는 뭔가를 쓰다가 이따금 연필을 내려놓고 가운뎃손가락 마디의 옹이를 한참 내려다보곤 한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 13쪽.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 14쪽.
늘 나는 세상일은 우연한 행운이 쥐고 흔드는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 생각은 행운을 가질 기회를 얻기까지는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꽤 건전한 정강으로 보완돼왔다.
/ 51쪽.
(읽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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