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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 손원평

opoi 2023. 6. 3. 15:51

23.06 학교 도서관

 
아몬드
영화와도 같은 강렬한 사건과 매혹적인 문체로 시선을 사로잡는 한국형 영 어덜트 소설 『아몬드』.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해진 공감 불능인 이 시대에 큰 울림을 주는 이 작품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의 특별한 성장을 그리고 있다. 감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열여섯 살 소년 선윤재와 어두운 상처를 간직한 곤이, 그와 반대로 맑은 감성을 지닌 도라와 윤재를 돕고 싶어 하는 심 박사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전한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년 선윤재. ‘아몬드’라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 분노도 공포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는 타고난 침착성, 엄마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에 별 탈 없이 지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이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벌어진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는다. 그렇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윤재 앞에 ‘곤이’가 나타난다. 놀이동산에서 엄마의 손을 잠깐 놓은 사이 사라진 후 13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곤이는 분노로 가득 찬 아이다. 곤이는 윤재를 괴롭히고 윤재에게 화를 쏟아 내지만, 감정의 동요가 없는 윤재 앞에서 오히려 쩔쩔매고 만다. 그 후 두 소년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고, 윤재는 조금씩 내면의 변화를 겪는데…….
저자
손원평
출판
창비
출판일
2017.03.31

 

글자를 씹듯이 음미하며 목소리로 내뱉는다. 계속 계속 외울 때까지 계속. 같은 말을 여러 번 되뇌면 말의 뜻이 흐릿해지는 때가 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자는 글자를 넘어서고, 단어는 단어를 넘어선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계어처럼 들린다. 그럴 때면, 내가 헤아리기 힘든 사랑이니 영원이니 하는 것들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나는 이 재밌는 놀이를 엄마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하얗게.

 

생일 축하해. 태어나 줘서 고마워. 어딘지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는 거다.

 

사람들은 계절의 여왕이 5월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려운 건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거다. 언 땅이 노고 움이 트고 죽어 있는 가지마다 총천연색 꽃이 피어나는 것. 힘겨운 건 그런 거다. 여름은 그저 봄의 동력을 받아 앞으로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온다.

그래서 나는 5월이 한 해 중 가장 나태한 달이라고 생각했다. 한 것에 비해 너무 값지다고 평가받는 달. 세상과 내가 가장 다르다고 생각되는 달이 5월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게 움직이고 빛난다. 나와 누워있는 엄마만이 영원한 1월처럼 딱딱하고 잿빛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 사랑.

⁃ 그게 뭔데?

엄마가 짓궂게 물었다.

⁃ 예쁨의 발견.

愛의 윗부분을 쓴 할멈이 가운데 마음 심 자를 써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 이 점들이 우리 셋이다.

 

⁃ 나한테 그건 있지, 살아서 뭐하려고, 하는 질문이랑 비슷해. 넌 무슨 목적이 있어서 사니? 솔직히 그냥 살잖아. 살다가 좋은 일 있으면 웃고 나쁜 일 있으면 울고. 달리기도 마찬가지야. 1등하면 좋고 아니면 아쉽겠지. 자책하고 후회도 하겠지. 그래도 그냥 달리는 거야. 그냥!

 

도라는 뭐가 우스운지 까르르 웃었다. 수백 개의 작은 얼음 조각이 바닥에 흩어지는 것 같은 웃음이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환영 같은 영상들이 머릿속에 한없이 반복 재생됐다. 출렁이던 나무들, 색색의 이파리들, 그리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 있던 도라.

벌떡 일어나 괜히 서가 사이를 걷고 국어사전을 뒤졌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단어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몸이 더웠다. 맥박이 귀밑에서 팔딱거렸다. 손끝에서도 발가락 끝에서도. 작은 벌레들이 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별로 상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머리가 아팠고 어지러웠다. 그런데도 그 순간을 자꾸만 떠올렸다. 도라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던 순간. 그 감촉과 냄새와 공기의 온도를. 새벽녘이 되고 하늘이 푸르스름해진 뒤에야 겨우 잠들었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앞질러 버린 몸이 여름에 입은 봄 외투처럼 불필요하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벗어 버리고 싶을 만큼.

 

그 애는 어디에서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거북이의 등딱지에서도, 황새의 알이나 가을 늪지대의 갈대에서도 대칭과 자연의 놀라운 손길을 찾아냈다. 도라는 아름답다는 말을 참 자주 했다. 나는 그 단어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 찬란함까지 생생히 느낄 수는 없었다.

 

도라가 나를 향해 웃어 주었다. 엄마는 여전히 천장의 별자리만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엄마한테 말을 해 보니 그렇게까지 의미 없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심 박사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빵을 굽는 게 이것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에 질렸다는 게 어떤 걸 뜻하는지 조금쯤 헤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소가 전혀 없는 곳에서 필사적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 기분. 곤이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내 아이라는 실감도 잘 나지 않았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다 해도 알아볼 자신도 없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이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변함 없이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큰다 해도? 그 질문에서 출발해 ‘과연 나라면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할 만한 두 아이가 만들어졌고 그들이 윤재와 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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