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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안희연

opoi 2023. 8. 26.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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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신동엽문학상 수상 시인 안희연 신작 시집 살아 있어서 울고 있는 존재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미더운 손길 *본 보도자료에는 시인과의 간단한 서면 인터뷰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안희연 시인의 세번째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등단 3년 만에 펴낸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고, 2018년 예스24에서 실시한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시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요즘 젊은 시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이다.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부치는 ‘304 낭독회’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대중적으로 친숙한 시인이기도 하다. 소시집으로 묶은 두번째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현대문학 2019)에 이어서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더욱 깊어진 시적 사유와 섬세한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서정과 감성의 다채로운 시세계를 선보인다. 삶의 바닥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슬픔을 헤아리는 “깨달음의 우화와도 같은”(이제니, 추천사) 뜨겁고 간절한 시편들이 공감을 자아내며 가슴을 깊이 울린다. ‘2020 오늘의 시’ 수상작 「스페어」를 비롯하여 57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실었다. 안희연의 시는 “쇠구슬 같은 눈물”(「연루」)이 차오르는 슬픔의 자리에서 태어난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니. 시인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려는 심정으로 시를 쓴다. 돌이켜보면 모두가 가엾은 존재들의 슬픔을 끌어안으며 대신해서 울어주고,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얻은 이야기들”(「구르는 돌」)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온 우주가 나의 행복을 망치려”(묵상」) 드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체가 고통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러니 “그게 무엇이든 무엇도 아니든” “계속 가보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구르는 돌」)다. 그리하여 시인은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열과(裂果)」) 다시 시작하고, 실패와 절망 끝에 남겨진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나”(「스페어」)를 사랑하며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시인은 그토록 오랜 세월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그러나 “미로는 헤맬 줄 아는 마음에게만 열리는 시간”(「추리극」)임을 알기에 저 너머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스페어」)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절망과 슬픔 속에 묻히기에는 “너무 커다란 우리의/영혼을 조망하기 위해”서 “뒤로 더 뒤로” “멀리 더 멀리 가보기로”(「자이언트」) 한다. 시인은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라 자탄하지만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슬퍼하다니. “물거품처럼 사라질”(「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이야기일지라도 절망 뒤에 오는 더 큰 절망을 기꺼이 껴안으며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업힌」) 마음으로 삶을 견디어가는 시인의 노래는 오히려 삶의 “고요한 맹렬”(양경언, 해설)이자 희망일 것이다.
저자
안희연
출판
창비
출판일
2020.07.24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길 즐긴다 

사랑의 형태

버리려고 던진 원반을 기어코 물어 온다 

쓰다듬어달라는 눈빛으로

숨을 헐떡이며 꼬리를 흔드는 

 

저것은 개가 아니다

개의 형상을 하고 있대도 개는 아니다

 

자주 물가에 있다

때로는 덤불 속에서 발견된다

작고 노란 꽃 앞에 쪼그려 앉아 

다신 그러지 않을게, 다신 그러지 않을게 

울먹이며 돌아보는 

 

슬픔에 가까워 보이지만 슬픔은 아니다

온몸이 잠길 때도 있지만

겨우 발목을 찰랑거리다 돌아갈 때도 있다

 

물풀 사이에 숨은 물고기처럼 

도망쳤어도 어쩔 수 없이 은빛 비늘을 들키는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 자신했는데

이름을 듣는 순간 그대로 풀려버리는

 

깊은 바닷속 잠수함의 모터가 멈추고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소리 없이 사라진다 

 

냄비 바닥이 까맣게 타도록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등 뒤에 있는 

이 모든 것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스페어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힌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몫 

앞니가 부러지는 꿈을 꿨어 

이가 상하는 꿈은 백이면 백 흉몽이라던데

 

이제는 호들갑 떨지 않는다 

몫이었겠지, 생각한다 

 

몫이라는 말을 처음부터 사랑했던 것은 아니야 

악어처럼 나를 물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지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리는 말이잖아 

다른 방도는 없다는 듯이 

어디 한번 달아나보라는 듯이 

 

이런 장면이 겹쳐지기도 했어 

죽은 토끼를 가운데 두고 맹렬히 싸우는 두 사람

묻자고 말하는 쪽과 묻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쪽

각자의 몫이 있었을 거야 

토끼는 그저 

 

유독 피곤했던 것일 수도

그날따라 잠이 미로처럼 깊어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은 것이었을지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어 

피에로의 고깔모자가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총새의 속눈썹이 견딜 수 있는 무게는 얼마인지 

죽음이 드나드는 문은 어디에 있는지 

 

몫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덜 미워하게 될는지도 

 

이제는 조바심 내지 않는다 

기차는 길고 길다는 건 

기차의 몫이 그러하므로 어떻게든 계속 가야 한다는 뜻 

 

영원히 잠든 토끼의 영원하지 못할 영혼을 생각하면

몫이라는 말 결코 다정하지는 않지만 

슈톨렌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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