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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는 꿈 / 최진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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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최진영
- 출판
- 현대문학
- 출판일
- 2021.02.25
가끔씩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째서 ‘마지막이 아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은 못했는지,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자책했다.
/ 10쪽.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 별 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지.
/ 22쪽.
아빠는 ‘이건 내가 원한 삶이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무척 억울하고 분하다는 표정으로. 아빠가 원하는 삶은 아빠의 머릿속에만 있다. 아빠는 삶이 알아서 그렇게 되어 주길 원한다. 아빠는 자기가 바로 삶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 것 같다.
/ 54쪽.
아빠에 비하면 엄마는 좀… 복잡하다. 엄마에 대해서라면 나쁜 말도 좋은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겠다. 엄마는 아빠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외롭게 한다.
/ 55쪽.
사과를 생각해 보자. 상한 사과는 상하기 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그럴 때 할머니는 상한 부분만 칼로 도려낸다. 때로는 덩어리째 베어 낸다. 상한 부분을 그냥 두면 사과가 통째로 물크러지니까. 상해 버린 내 자존심도 도려내든가 베어 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통째로 물크러질 테니까. 내 자존심은 도려낸 만큼 줄어들었다. 이제 나는 남들보다 꼬깔콘 크기 정도는 모자란 자존심으로 계속 살아야 한다.
/ 57-58쪽.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엄마가 밀크셰이크를 사 줬다.
/ 66쪽.
편지는 이상하다.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펼치면 내가 전혀 몰랐던 마음이 펼쳐진다. 말은 사라지고 기억은 희미해져도 글자는 남는다. 비밀스러운 마음이 선명하게 남아 버린다. 내게 그걸 주면 나는 가진다. 편지를 쓸 때의 그 마음을 나는 확실히 가진다.
/ 86쪽.
그러니까 편지는 위험한 거야.
책상에 늘어놓은 편지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음을 글자로 전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하지만 나는 한수의 편지를 사랑한다. 한수의 편지를 읽으면 나란 존재가 (잠깐이나마) 좋아진다. 한수의 편지는 주사 같다. 읽을 때는 아픈데 읽고 나면 어딘가 나은 것만 같다. 지금보다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
/ 92쪽.
그는 부족함을 몰라서 부족한 것이 없다. 잘못을 몰라서 잘못한 것이 없다.
/ 95쪽.
내가 여기서 잘 버티면 너는 그곳에서 평안할까.
네가 거기 잘 있다고 상상하면 이곳의 나는 조금 용기가 난다.
/ 98쪽.
과거가 아깝다. 살아갈 날보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아까워. 겨우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 98쪽.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
/ 99쪽.
일기장과 편지에는 정확히 나의 이름이 있고 누군가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있다. 남들에겐 종이 쓰레기에 불과한 그런 것들만이 제대로 나를 설명해 준다.
/ 125쪽.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거나 쓸모없는 것이 내겐 가장 소중한 것. 그런 것에는 나의 슬픔이 묻어 있다.
/ 126쪽.
내가 만약 천사의 장난감을 간직하지 않았다면 나도 천사를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버릴 수 없어서 다행이다. 버릴 수 없다는 마음은 중요하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떠올리고 싶었다.
/ 126쪽.
김선우는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가 헤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표정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내가 떠올린 김선우는 우리 사이가 좋았던 때의 김선우였다. 우리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 153쪽.
봄에 비가 내리면 꽃이 진다. 여름에 비가 내리면 개구리가 운다. 가을에 비가 내리면 낙엽이 물들고 겨울에 비가 내리면 눈을 기다리게 된다. 숲에 비가 내리면 나무가 자라고 논밭에 비가 내리면 곡물이 자란다. 운동장에 비가 내리면 흙이 젖고 도로에 비가 내리면 아스팔트가 식는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바다가 된다. 바다가 될 뿐이다. 무수한 물방울이 거대한 물에 합쳐질 뿐이다. 대체 무슨 소용이지? 물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밖에 될 수 없다는 게? 물고기는 물고기로만 살고 새는 새로만 사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자 너무 갑갑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지? 신은 신으로만 살까? 신은 우주인가? 우주는 우주로만 존재할까? 우주조차 우주로만 존재한다면 우주도 갑갑하다. 너무 따분하다. 세상은 칙칙한 해변과 먹먹한 하늘과 거대한 바다와 곧 바다가 될 빗줄기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 내 안에 갇힌 나를 꺼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엇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나겠지. 마트료시카처럼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 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 포기를 위해 꿈 꾸는 것만 같다. 가방에 국어사전이 있었다면 ‘허무’라는 단어를 찾아봤을 거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과 ‘허무’가 딱 들어맞는 단어인지 확인해봤을 거다.
/ 164-166쪽.
올 때만큼 기나긴 길이 남아 있었다.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집에 닿으면 깜깜한 밤일 것이다. 여전히 비가 내릴까? 집은 변함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방에서 똑같은 이불을 덮고 누울 것이다. 하지만 이모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잠들겠지. 비 내리는 바다를 봤고 사실을 확인한 나도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잠들 것이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섞인다고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이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
/ 170쪽.
둘은 서로를 마음껏 미워했으면서, 그래서 내게도 미움을 옮겼으면서, 이제 와서 미워하지 말라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 178-179쪽.
아빠도 형편없지. 형편없는 우리를 위해서는 뭔가를 할 자신이 없어. 그래서 핑계가 필요해. 지금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핑계. 네가 핑계가 되어 주면 좋겠어.
/ 180쪽.
엄마는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서투르고 나약한 사람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 핑계를 대고 잘 지내면 좋겠다고.
/ 181쪽.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만 계속 떠올랐다. 해야 할 일을 대충이라도 해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184-185쪽.
젊은 시절의 엄마 아빠처럼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상대를 증오하는 방법으로 정신없이 화를 내며 살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어린 시절의 내가.
이거 야광이다.
말해 주려고.
/ 192쪽.
물이었고 불이었고 빛이었던 아이는 이제 꿈이기도 하다. 상처가 있지만 상처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비극적인 일을 겪었지만 비극의 주인공처럼 살지 않는다. 내 삶은 해피든 새드든 결정된 엔딩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증명한다. 계속 살아가는 것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쓰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 것으로, 계속 증명해 낸다. 이것이 증명인 줄도 모르고, 내가 이미 내가 됐다는 것도 모르고, 꿈을 곁에 두고 사는지도 모르고, 이토록 용감하고 대범하게 사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고 쓴다.
/ 233-234쪽.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일곱 살, 열다섯 살, 스물세 살, 서른여섯과 마흔여덟 살, 쉰아홉 살, 기타 등등의 나를.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 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식 단단해진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공간, 다양한 우주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떤 세계에서 내가 슬퍼할 때 다른 세계에서 나는 기쁘다. 저 세계에서 내가 삶의 경이로움에 빠져 있을 때 그 세계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 삶을 저주한다. 무수한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없고 유일한 나는 찰나의 찰나. 우주는 아주 넓고 깊고 신비로우므로 내가 유일하든 무수하든 상관없을 테고,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허무를 잊지 않으면 낙관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담대해진다. 괴팍한 불안이 혼자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고 소설을 쓸 수 있다. 쓰다 보면 견딜 수 있다.
/ 236-237쪽.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똑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일의 나 또한 여전히 쓰는 사람이길 희망하며,
/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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